존 헨리 뉴먼, [동의의 문법에 관하여] 1955:

... 연역적 논증은 설득하는 힘을 지니지 못한다. 보통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직접적인 인상, 사실과 시간들에 대한 증언, 역사, 서술 등의 방법으로 구현되는 상상력이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목소리는 녹이며, 형태는 어루만지고, 행동은 가슴에 불을 붙인다. 많은 사람이 도그마를 위해 목숨을 던질 것이지만, 아무도 논증의 결론을 위해 순교자가 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론은 그저 의견일 따름이다.
C. S. 루이스, [언어에 대한 연구] 1967:
... 그 최고 형태에 있어 광기에 근접하는 그것, 생산하고 창조하는 힘, 비판적 판단력과는 확연히 다른 것; 상상력... 이것이 위대한 작가와 신통찮은 작가를 판가름하는 잣대이다...
2007/11/29 18:00 2007/11/29 18:00

명색이 그래도 SF/판타지 팬페이지인데 그 쪽 관련 포스트가 하나도 없으면 곤란할 것 같아서 우선 근황보고부터 하려고 한다. 이제 미국땅에서 신간 사냥하기, 헌 책방 순례 등의 재미를 누릴 날도 많이 남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읽는 속도를 몇 배 능가하는 속도로 책을 사고 있다. 슬픈 사실은 그렇게 사 재 놓은 책 중에 재미있는 것이 몇 안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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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슴을 친 한 권이 있다면 Mark J. Ferrari의 The Book of Joby. 또 한권의 욥기 코멘터리인가 하고 읽어보니, 이거 정말 근사한 책이다. 성서와 신학 쪽으로 약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긴 하지만 대단히 종교적인 주제를, 더우기 교양소설이라는 틀 안에서 종교적인 편향성 없이 그려낸 작가의 재주는 놀랍다. 이 소재를 다룬 소설은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테드 치앙의 Hell is the Absence of God이 있지만, 페라리씨의 소설은 대형 장편이고 또 오갈 데 없는 정통(그러니까 구식) 어번 판타지라는 점에서 다르다. ISBN: 978-0-7653-16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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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치기 2등, John Connoly의 The Book of Lost Things. 이것도 교양소설이다... 어머니를 잃은 소년이 새어머니와 의붓 동생을 용납 못하고 동화 속 세계로 빠져든다 - 고전 동화들이 현실이 되어 있는 이 세계에서 주인공 David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 플롯만 놓고 보면 재미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이 책은 재미가 문제가 아니고 감동을 주는 책이다. 며칠씩 뇌리를 점령하고 떠나지 않는 진한 여운이 있다. Connoly씨는 원래 심령 미스터리/호러 계열인데, 이 책은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장르가 다르다. 아, 이것 청소년/아동용이 절. 대. 아니다 - 성인용, 그것도 19금이다. ISBN: 978-0-7432-9885-8.

여기부터는 뭐 그럭저럭 재미있네 했던 책들:

Scott Lynch의 Red Seas under Red Skies,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The Lies of Lock Lamora의 씨퀄이다. 주인공인 록 라모라는 전형적인 "착한 트릭스터" 인데, 아주 오래되고 어떻게 보면 이미 닳아빠졌다고도 할 수 있는 구성을 꽤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추리 드릴러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어서 읽기 쉽고 술술 잘 넘어간다. ISBN: 978-0-553-80468-3.

Kage Baker의 11권에 달하는 Company 씨리즈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마지막 권이라고 생각되는 The Sons of Heaven이 나왔는데, 서두르는 감 없이 그 동안 온 사방에 흩뿌려 놓았던 플롯들을 잘 거둬모아 마무리한다. 흥미로운 소재, 약간 가벼운 톤이긴 하지만 어설프거나 경박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든다. 인문계열 SF를 원하는 독자에게 권할 만 하다. 이 씨리즈는 그야말로 번역될 것 같지 않은데... 단편집 형식으로 나온 두 권은 혹시 가능성이 있으려나. ISBN: 978-0-7653-1746-9.

Patrick Rothfuss, The Name of the Wind. 이것도 전형적인 교양소설이고 아주 고지식한 구식 판타지다. 마법사를 주인공으로 삼고 마법이 주된 스토리 동인으로 작용하는 "마법학원" 판타지는 아주, 아주 많이 있는데... 로맨스/어드벤쳐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기가 쉽지 않은 모양으로, 음 이거 좋네 하고 느끼는 것은 몇 안 된다. 흠 그러고 보니 해리 포터가 바로 이 계열에 속하는구만. 660페이지짜리 장편인데 제대로 끝이 나지 않는다. 다음 편에 계속, 하고 끝난다... 요즘 이런 판타지가 많다. 장편 에픽을 좋아하긴 하지만 어쩐지 이것도 상술인 것 같아 짜증난다.

Abram Davidson의 Adventures in Unhistory. 이것은 소설이 아니고 에세이집인데, 판타지에 자주 등장하는 신화적 원형들을 판타지작가의 눈으로 유머러스하게 분석하고 있다. 아브람 데이빗슨은 그 박학다식으로 이름난 사람인데 과연 학이 박하다고 절절히 느끼면서 읽게 된다. 술집에서 한 잔 걸치고 대화하는 듯한 문체로 씌어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아름다운, 공력이 깃든 문장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딴 사람도 아닌 피터 비글이 서문을 썼다 -- 명문장끼리들 노시는군. ISBN: 978-0-765-30760-6.

말하기가 무섭게 나온다 - Peter S. Beagle, The Line Between. The Last Unicorn과 Innkeeper's Song, 아니 무엇보다도 단편 Professor Gottesman and the Indian Rhinoceros를 읽고 감명 먹은 후 그의 책이라면 일단 사고 본다. 이 단편집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상당히 좋다. 그 중의 한 편인 El Regalo는 한국계 미국인 남매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2005년에 나와서 이미 널리 알려진 Two Hearts. ISBN: 978-1-892391-36-0.

... 실망했던 책은 많지만 그 중 가장 실망이 컸던 것은 스티븐 에릭슨의 A Tale of the Malazan Book of the Fallen -- 아 씨리즈 이름 한 번 기네. 이것도 그 간 두 권이나 신간이 나왔는데, 어쩐지 씨리즈 초반의 막강한 재미를 흐지부지 잃어버린 것 같다. 마지막 권인 The Bonehunters 는 벌써 두 달 째 끝내지 못하고 있다.

근래 읽었던 책들 목록을 적고 보니, SF가 한 권 뿐이고 또 거개가 교양소설이다. 교양소설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째서 이런 패턴이...?

2007/11/26 10:35 2007/11/26 10:35

책을 많이도 샀다. 사고 싶은 것들 반도 못 샀는데도 50불이 넘어간다. 아,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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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테어 레이놀즈의 [Absolution Gap]. 김상훈님의 추천으로 3부작 중 앞의 2권을 이미 구입, 다 읽어가는 마당에 마지막 권이 나왔으니 눈물을 머금고 하드커버를 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연 이게 마지막 권일까...? 레이놀즈는 스토리텔러로서 재능도 출중하지만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의 매너가 아주 좋아, 정말 마음에 드는 중이다. 절도라고나 할까, 그의 셰익스피어적인 detatchment는 앙가주망의 분위기가 왕성한 SF계에서 드물게 보는 미덕이다. 주인공들도 정말 흥미롭고... 이건 독후감을 써 올릴 만한 씨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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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aine Harris의 [Dead to the World]. 어느 분인가 행책 싸이트에서 말씀하신 대로, 인기가 좀 오르면 하드커버로 내는 행태에 분개는 하지만... 못 기다리고 덜렁 사 주는 나같은 소비자 때문에 그런 짓들을 하는 거겠지? 이 책은 여러가지 의미로 너무나 미국적이기 때문에 번역은 안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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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나왔던 책인데 페이퍼백이 있길래 들고 왔다 - Jack McDevitt의 A talent for War. 이 표지, 옛날에 홍인기님이 정크에 멋진 투구라며 소개했던 것 본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국 SF 출판계의 표지 디자인을 정말 싫어한다. 대체로 촌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 내용과 별 상관없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도 그림을 정말 못 그렸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하지만 이 촌티영롱의 경향은 스페이스 오페라 쪽 - 특히 Baen - 의 경우 심각하다. 오징어 사촌 외계인, 최소면적의 복장을 한 여자주인공, 그랜다이져 스타일의 우주선, 광선총(!), 어쩌면 그렇게도 다들 똑 같으며 그렇게도 용감무쌍하게 유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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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리 맥과이어의 [Wicked: the Life and Times of the Wicked Witch of the West]. 이 책도 나온지는 꽤 되었지만, 뮤지컬로 만들어져 히트하는 바람에 새 표지를 달고 재판되어 나왔다. 맥과이어는 [Confessions of the Ugly Stepsister]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으므로 재미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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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Reed의 [Sister Alice]. 이 소설, 그 한 부분이든지 아니면 중편 형식으로든지 어디선가 언젠가 읽었던 것인데... 아주 흥미로왔던 인상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Marrow]가 재미있었으니 이것도 재미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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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a Goldstein, [The Alchemist's Door]. 역시 나온지는 제법 되었고 전부터 사고 싶었지만 어쩐지 이번에야 구입. 마법사 존 디가 주인공이고, 골렘도 나오고, 흠. 이런 것 좋아한다. 물론 흥미로운 아이템만 갖고는 안 되지. 스토리가 재미있어야지...

그리고, 가드너 도즈와의 2003년 베스트 SF. 도즈와의 앤솔로지는 어쩐지 새 학년 되어 새 교과서 사는 기분이다. 골라놓은 소설들도 물론 대체로 재미있지만, 새로운 작가들과 새로운 경향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SF 헌팅하는 데 좋은 길잡이 노릇을 한다. 중단편 읽어보고 스타일이 맘에 들면 그 작가의 신작이나 장편을 고르게 되곤 하니까... (사실 바로 그게, 이런 두꺼운 책을 상당히 싸게 내 놓는 출판사의 속셈이겠지만) 도즈와의 입맛에 너무 맹목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긴 하지만, 뭐 도즈와 정도의 입맛이면 좀 따라간들 큰 탈이야 날까.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 속편은 못 샀고, 진 울프의 새 단편집도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외에도 여러 권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망설였다....

2004/07/08 12:28 2004/07/08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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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프레스티지] 완독. Wizardry가 아닌, 현대 스테이지 마술과 일루져니스트들을 소재로 삼은 아주 독특한 판타지다. 무지무지 복잡하고 층층이 중첩된 플롯을 다루는 솜씨하며 가다듬어진 문장, 생동하는 인물들, 빈번히 그러나 적절히 교차하는 시점, 판타지 아니라 그냥 소설로 봐도 아주 빼어나다. 독후감을 쓸 만큼 강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재미있었던 것은, 니콜라 테슬라가 등장한다는 점. 테슬라는 에디슨과 동시대의 실존했던 인물로 전기 관련 발명과 시대를 앞선 이론들로 그 이름을 후세에 전하지만, 아쉽게도 에디슨만큼 유명하질 않다. 에디슨의 직류 대신 테슬라가 제안했던 교류 (Alternate Current) 시스템을 세계적으로 mains power로 쓰고 있는데도, 전기 하면 에디슨을 기억하지 테슬라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장사에도 능했던 에디슨보다 테슬라가 발명가 및 이론가로서 더 뛰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순수한 재능만 갖고는 “성공“ 하기는 어려운 듯. 테슬라는 로켓 발사, 무선전신 등 당시로서는 마술이나 다름없는 실험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그는 스파이더 로빈슨의 [Lady] 씨리즈에도 등장한다. “잊혀진 천재 과학자“라는 아이템에 SF 작가들에게 어필하는 뭔가가 있나보다.오디오도 좋아하는 나는, 테슬라의 이름이 물론 낮설지 않다. 지금은 나누어져 EI와 JJ로 브랜드명도 바뀌었지만, 한때 명성 높았던 진공관 브랜드 하나가 바로 그의 이름을 따른 테슬라였다. JJ는 지금도 진공관이며 컨덴서 등 전기관련 부품들을 생산하고 있고, 품질도 좋아 찾는 사람이 많다.


마비노지온은 열심히 읽고 있는 중. 영어가 쉽지 않은데다가 꽤 긴 책이라... 좀 더 걸릴 듯하다.이 4부작은 고대 웰쉬 전설을 번안에 가까울 만큼 충실히 현대에 전하는 고전 판타지로, 작가 에반젤린 월튼은 순진하면서도 재치있게 변사 노릇을 한다. 10대 후반부터 초로에 이르기까지 거의 평생에 걸친, 엄청난 양의 공부와 사색이 집중된 대작임에는 틀림없지만... 허전하고 심심한 느낌을 지울수 없다. 현대 장르 판타지에 익숙한 독자들 대부분은 너무 구태의연한 서사라 짜릿하고 극적인 맛이 모자란 듯 느낄 것이다.

누가, 언제, 우리 민족의 전설과 신화들을 이렇게 장르 문학으로 형상화하게 될까. 아, 그런 시도들은 있었고 또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성취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무협이나 만화 장르에서 시도되어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도 몇 있으니, 판타지 쪽에서도 곧 소식이 있겠지. 좋은 소재를 어설프게 낭비해 버리지 말고 이 월튼 여사처럼 평생을 바친 무게있는 시도를 할 여유가, 우리나라 판타지 작가들에게도 곧 생기겠지...

결국 고학력에 고수입에 높은 교양까지 갖춘 백수들이 많아져야 하나?

2004/05/24 11:36 2004/05/24 11:36

케이지 베이커의 [The Anvil of the World] 어저께 다 읽었다. 재미있는 판타지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밤을 새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음날 일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논문 쓰는데도 지장이 있다 (단어나 문장이 판타지스럽게 된다?)

어쨌거나, 제 일급이라고 할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사갈 때 내다버리는 부류에는 속하지 않고 제법 훌륭하다. 작가의 통제력에 감탄. 모든 것이 적절하고 깔끔하다... 장편 에픽 스타일 하이 판타지를 좋아한다면 맞지 않는 책이지만, 가벼우면서도 날카로운 맛이 있고 잘 쓴 책을 찾는다면 강추. 날카로우면서도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시니컬하지 않고, 상당히 주장하는 바가 있지만 설교하지 않고 우아하게 넘어가는 면이 특히 좋다. 예리하고 생생한 인물 묘사와 대화는 특급이다. 주인공은 일종의 안티히어로인데, 예쁜 여자만 보면 섹슈얼 패닉에 빠져 어버버거리는 것이 참... 귀엽다?

게다가, 진 울프나 메리 젠틀 류의 SF/판타지 짬뽕을 약간 시도하는데, 아주 잘 하고 있다. 진 울프처럼 철저한 짬뽕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판타지에 짬뽕 양념을 약간 넣은 거지만, 대단히 효과적이다.


그렉 이건의 [The Schild's Ladder]도 다 읽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사이언티즘의 프로파간다가 너무 눈에 거슬린다. (물론 하드SF 독자들을 만족시키려면 이 양념이 안 들어갈 수 없겠지만...) Schild's ladder는 고등기하학과 양자역학의 만남 -- 실제로 시도되고 있다고 한다, 완전히 이론 수준이지만 -- 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작가의 설교는 주로 neophobia를 지양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환영해야 한다는 것인데...

대부분의 과학소설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렉 이건도 하드코어 보수주의의 핵심을 오해하고 있다. 진정한 보수는 바로 인간에 대한 회의이며, 인간의 사고와 액션이 무엇인가 새롭고 더 나은 것을 창출할 가능성에 대한 배척이다. 공산/사회주의는 바로 이 이유로 보수적인 사상이 될 수 없고, 기독교도 궁극적으로 보수가 될 수 없다. Scientific method는 그 자체로 무슨 이념이 아니므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과 상관이 없지만, 과학소설에 등장하게 되면 딱 갈라져서 이념이 되어 버린다... 이념이 아닌 과학적 사고방식은 종교나 도덕과 충돌할 일이 없지만 scientism은 이데올로기이므로 이런저런 종교, 철학, 도덕 등등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고, 따라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작가의 인간에 대한 이해도 문제. 그렉 이건은 [인간성]을 열린 시각으로 보자고 말한다. 인간성이란 것은 arbitrary concept 라고 한다. 그것은 지적으로 방어가 가능한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성의 외연을 열어 놓고 살려면 믿음이 필요해진다! 자아를 불확정상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도. 누구나 다 그런 영웅적인 믿음과 용기를 지니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작가의 프로파간다를 차치하고 보면 그런 대로 괜찮은 하드SF이긴 한데... 숙제도 제대로 했고... 생생한 인물 묘사나 박진감 넘치는 액션은... 엥, 별로. 섹스의 미래상 묘사는 이 소설의 또 다른 큰 부분인데, 이것도 그리 신통치 않다. 베이커와는 달리, 이사갈 때 버리고 갈 소설이다.

2004/05/02 14:20 2004/05/0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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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고 있는 책들:

  • 루디 럭커, [The hacker and the ants]. [White Light] 와 [Frek and the Elixir] 가 인상깊어서 샀는데 아직 좀 재미없는 중이다. [2004/05: 재미 없었음]
  • 그렉 이건, [Schild's Ladder]. 앗, 이건 재밌다. 역시 그렉 이건. [2004/05: 음... 다 읽고 보니 약간 별로.]
  • 제인 젠센, [Dante's Equation]. 조금만 통속 드릴러물 냄새가 덜 났더라면... 시간때우기용.
  • 케이지 베이커, [The Anvil of the World]. 아직 시작 부분이다.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 [2004/05: 대단히 재미있었음.]
  • 그리고,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로버트 홀드스톡의 멀린 코덱스 제 2권, [The Iron Grail]. 말할 것도 없이 재미있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훌륭한 작품. 아직 반 정도밖에 안 읽었다. 아껴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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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었던 책들:

  • 댄 시몬즈, [Ilium]. 호머의 일리아드를 SF로 새로 만들기. 하하! 하이피리언보다 더 재밌었다. 하지만 대체 몇 권짜리가 될런지 작히 궁금하다... [2권으로 끝.]
  • 진 울프, [The Knight]. 이것 역시, 멋지다. 희한한, 주인공이 될 것 같지 않은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진 울프의 재주는 추종 불허. 꼬일 대로 꼬인 플롯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여 몽롱하게 만드는 실력도... 근데 이것도 3-4권 혹은 그 이상 나갈 것 같다. [이것도 2권으로 끝.]
  • 역시 진 울프의 옛날 책, [Latro in the Mist]. 단기기억 상실증의 주인공! 어제 일을 기억 못하는 주인공의, 그것도 1인칭 소설! 참 이런 게 가능하구나...
  • 스티븐 브루스트의 피닉스가드 씨리즈 마지막 권, [Sethra Lavode]. 대실망. 이 양반 내공이 고갈됐나...?
  • 조너선 레듬, [Gun, with Occasional Music]. 많은 이들의 칭찬을 받은 작품이라 큰 기대를 품고 읽었는데... 뭐, 잘 쓴 작품이긴 하지만 끝장나게 재미있지는 않았음.
  • 피터 해밀튼, [Pandora's Star]. 이것 재미있다. 내가 좋아하는 대형 스페이스 오페라. 근데 역시 최소한 3권은 갈 모양이다. 중진 작가들의 권수 늘리기는 최근의 유행인 듯, 너도 나도... [2권 Judas Unchained 나옴. 2권으로 종결]
  • 존 포드, [The Last Hot Time]. 올해 읽은 최고의 판타지! 어째서 이런 책이 유명하지 않다지? [John M. Ford, 2006년 9월 25일 사망.]
  • 스파이더 로빈슨, [The Calahan Cronicals]. 엄청난 인기의 이유를 알 만하다. 좀 설교투가 되는 것이 께름하긴 하지만. 음악과 오디오를 좋아하는 작가라서 약점들도 다 곱게 보인다.
  • 영재가 번역하려다 때려친 (뭐하니 영재야?) 마이크 레스닉의 산티아고 속편, [The Return of Santiago]. 재미있었다. 이 양반 정말 잘 쓰는데 왜 3류 취급을 받는지...?
  • 할 클레멘트, [The Noise]. 그의 장기인 치밀한 세계구성이 빛을 발하는 한편, 스토리 자체는 다소 밋밋. 이것도 단권으로 안 끝나고 한 두어 권 더 나올 모양이다. [할 클레멘트, 2003년 10월 사망.]
  • 쥬딧 타르와 해리 터틀도브가 같이 쓴 [The Household Gods]. 음, 좀 진부한 아이디어긴 하지만 (타임 슬립) 고대 로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겐 짜릿하게 재미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로선 과다하게 설교조로 읽혀서 별로.
  • 메리 젠틀, [Grunts]. 온갖 판타지물에서 두들겨맞고 개박살나는 담당인 오크가 여기선 주인공! 이거 정말 재미있다... 메타판타지라고나 할까, 판타지 루틴에 익숙하다못해 식상한 독자들에게 가려운 등 긁어주는 소설.
2004/04/28 04:12 2004/04/28 04:12

아래 글은 2003년에 써 올린 것으로 예전 홈에서 가장 조회수/펌 수가 많았던 글이다. 혹시 이 자료를 링크타고 찾는 분들이 있을까 하여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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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설을 써 보려고 시도한 이래 여기저기서 모아 둔 팁들입니다. 중후장대형 본격소설보다는 판타지나 무협 등 장르소설에 유용한 조언들을 구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팁이 필요없으신 분들... 부럽습니다.

1. 소설 일반

1) 멜로드라마와 드라마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기본적으로 먼치킨들이다. 멜로드라마의 악당들 역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확실한 악당들이다.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사랑은 옆눈 팔지 않고 맹렬히 불타오르는 사랑이고, 멜로드라마의 우정과 헌신, 배신과 복수는 철저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고 깔끔하다. 멜로드라마의 인물들은 “virtuous to extreme”으로 요약된다 (by Sol Stein).

드라마는 비록 극적이지만 멜로드라마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며, 적어도 등장인물의 개성과 행동이 극단적이지 않고 “있을 법한” 점에서 다르다.

통속소설은 대부분 멜로드라마틱하다. 하지만 꼭 그러라는 법이 있나? 약간 입맛이 까다로운 통속소설 독자들은 멜로드라마의 “문법”에서 한 발짝 두 발짝 벗어난, 슬그머니 리얼리즘의 냄새를 풍기는 소설을 환영할 것이다.

2) 대원칙: Show, don’t tell

독자가 원하는 것은 신선하고 흥미로운 경험이다. 잘 구성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작가의 책임이요, 그 경험의 일관성을 해치는 모든 것이 죄악이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설교나 강의는 금물이고 설명보다는 묘사가 우선이다.

결론을 말하지 말라는 거다. 온갖 정보는 제공하되 데이타로서가 아니라 경험으로서 그렇게 하고,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판단은 독자들이 내리도록 비워둔다는 거다.

시점을 선택했으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험이 일단락되기까지 그 시점을 벗어나지 말라.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당신의 여주인공은 지금 기온이 몇 도인지, 맞은 편에서 역시 개를 끌고 걸어오는 남자 키가 딱 얼마인지 알 도리가 없다. (3인칭 제한적시점 혹은 1인칭 시점인 경우. 전지적 시점일지라도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좋다.)

등장인물의 감각과 인상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라. 감각과 인상을 독자들이 차근차근 경험할 수 있도록 재단하여 전달하라. 장면의 가장 중요한 감각적 인상을 항상 명심하고 그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하는데 촛점을 맞추라.

등장인물을 “보여 주라,” 설명하지 말고.

전능한 감독으로서, 자기가 찍는 영화에 등장하고 싶을 것이다. 이 유혹에 극구 저항하라.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세계에 대해, 당신의 전지전능에 대해, 이 소설의 교훈과 심각성에 대해 독자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싶을 것이다. 독자들은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지 작가한테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더우기, 설교하는 작가는 통속소설 독자들이 가장 미워하는 족속이다.

경험은 좋은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이야기해 버리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독자들이 무엇인가 경험하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당신이 실제 겪은 일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보면 보통 별 재미없다.

3) 3요소

흔히 스토리 구성의 3요소라 하면 환경, 갈등, 그리고 해결이라 한다. 해결도 알겠고 환경도 알 것 같은데 갈등과 환경이 헷갈린다. 주인공이 처한 환경 자체가 문제인 수도 있겠지만, 거기다가 새로운 (그러나 관련은 있는) 고민거리가 하나 (혹은 일반적으로 여럿) 더 생겨서 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바로 갈등요소이다.


2. 스토리 컨셉

종이와 연필 말고 소설 쓰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을 하나만 더 들라면 “스토리 컨셉 concept”을 꼽을 수 있다. 스토리 컨셉이란 “그 책 뭔 내용인데?“라는 질문에 대해 “ .... 에 대한 얘기야“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 즉 스토리의 본질적 내용이다. 주제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스토리 컨셉은 허무주의자인 한 청년이 범죄와 참회를 통해 인간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주제는 몰겠당?) 에잇, 쉬운 예를 들자. 춘향전의 스토리 컨셉은 기녀의 딸이 갖은 역경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정절을 지켜 사랑하는 상류층 도련님과 결혼에 골인한다는 것이다. 주제는 뭐 사랑은 계급을 초월하고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다, 쯤이겠지.

이 컨셉은 사건일 수도 있고, 인물일 수도 있다. 보통 주류문학에 속하는 소설들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반면에 일반적으로 통속 소설들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드물게 “교훈적” 이야기도 있다.

컨셉은 한 두 문장 내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헐리우드 영화의 스토리 컨셉은 보통 25단어 이내이다. 컨셉이 머릿속에 딱 들어있으면 되긴 하지만, 습작기의 작가라면 소설을 쓰기 전에, 플롯 구성을 하기 전에 이 컨셉을 요약해서 적어놓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 컨셉은 글을 써 나가다 보면 바뀌는 수가 많다.

컨셉은 흔히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경험이나 작가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슈에서 나온다. 컨셉을 개발하는 좋은 방법은 자신의 경험을 “만약에…” 에 대입하는 것이다.

스토리 컨셉의 핵심은 긴장과 대립이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극적인 행위들로 구성되고, 극적이라는 말은 대립, 위기, 고난 등등 일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스토리 컨셉이 아닌 것의 예: “왕자님과 공주님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긴장, 알력, 위기가 없으면 소설이 안된다.

3. 플롯

플롯은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플롯은 의미있는 사건들의 연결이다. 사건은 스토리의 근본적 갈등과 관련하여 의미를 띠게 된다.

1) 전체 아웃라인 구성

소설의 뼈대를 준비할 때 유용한 방법은 장면으로만 구성된 아웃라인을 작성해 보는 것이다.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이 장면 아웃라인이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 – i. e. 가급적 단순한 액션의 서술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웃라인은 십계명 돌판이 아니다. 쓰면서 바꿀 수 있고, 또 십중팔구 바뀌게 될 것이다. 각 장면을 독서카드 따위에 적어서 나열해 보는 것은 재배열시 쓸모있는 방법이다. 스토리 컨셉의 발달과 진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장면들을 줄이거나 없애라. 소설 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최소한 큰 장면들은 대충 설정해 두는 것이 좋다. 특히 제일 큰 장면 즉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폭발하는 순간 – 클라이맥스, 오르가즘 – 을 먼저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다.

2) 개별 장면 구성

  • 각 장면이 독자의 감정을 어떻게 자극하는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강하게?
  • 이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누구에게 가장 호감이 가는가? 독자들이 동일한 인물에게 호감을 품게 하려면? 장면의 관점이 가장 호감이 가는 인물의 관점인가?
  • 이 장면에 주인공과 대척되는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가?
  • 장면의 구성이 액션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 장면의 서술이 독자들의 시야에 드러나 있는가?
  • 장면의 종결이 독자로 하여금 다음 장면을 고대하게 만드는가?
  • …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 고대했던 것이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가? (독자가 원하는 것을 주지 말라. 애를 태워라.)

3) 각 장면의 배치

큰 장면 중 첫 번째 것은 되도록 빨리 나오는 것이 좋다. 이야기 초반부터 장차 닥쳐올 더 큰 장면들을 계속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라. 묵시적/상징적인 예고편을 방영하라. 그래놓고는 소소한 장면을 슥 끼워넣어 독자를 애달게 만들어라. “폭풍 직전의 고요” 분위기를 조성하라. 마침내 그 “폭풍”이 닥쳐오면, 애달게 만든 만큼 독자들에게 꼼꼼하고 철저한 경험을 전달함으로써 써비스하라.

큰 장면들은 파국이나 각성으로 결말이 난다. 이 파국이나 각성들은 최종적인 파국 혹은 각성과 근친관계라야 하고, 그 최종적인 파국/각성을 지향해야 한다. 최종적인 파국/각성 즉 클라이막스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통상 많이 쓰는 결말의 종류에는 죽음, 여행, 반복, 각성, 반전 등이 있다.

4. 인물 창조

캐릭터의 네 가지 차원을 한 번 보자: 외모, 행동,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성, (겉에서는 안 보이는)인간성. 이 네 가지는 물론 동일한 인물의 다양한 면모이므로 통일성이 있어야 하겠다.

등장인물들의 대조적인 개성이 저절로 엮어내는 플롯이 가장 쉽고 또 효과적이다. 즉, 별난 주인공이 훌륭한 주인공이다. 먼치킨 류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 대부분이 왜 불쏘시개로 분류되는가? 그들의 슈퍼맨스러운 능력들이 전혀 별나지 않기 때문이다.

별난 점은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주인공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 그것이 별난 것이면 좋다. 잘 생각 안 난다면 당신 자신이 무엇이든 별난 것을 원하는게 있는지 생각해 보라. 우등생의 삶을 살아온 작가지망생들은 이 점에서 곤란을 겪는데, 그들 내면에 깊이 숨겨진 비밀스런 욕구들(잘 숨기기 때문에 우등생일 수 있다)을 하도 꽁꽁 숨겨놔서 본인들 스스로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미성숙한 작가들은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칭송을 듣고 싶고 뻐기고 싶기 때문에, 먼치킨을 자기들 소설에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러나 그런 먼치킨들은 불행히도 사랑스럽지 않다. 초인물의 대가인 젤라즈니도 먼치킨들을 주인공으로 애용하지만, 그들은 생동감도 있고 흥미로운 먼치킨들이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인물 창조시 유용한 팁들:

  • 인물의 가장 취약한 면과 가장 뛰어난 면을 정하라.
  • 시급하고 간절한 목표/욕구를 부여하라.
  • 특정 상황에서 이 인물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고려하라.
  • 내면적 갈등을 심어주라

당신의 주인공에게 생동감이 부족한 듯하다… 그럴 때,

  • 동화책을 읽어 보라. 동화의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대단히 개성적이다. 삐삐 롱스타킹을 기억하는가?
  • 주인공의 주머니 속, 지갑 속, 목에 걸고 있는 로킷 속을 조사해 보라. 이상한 게 나오지 않는가? 빛바랜 사진? 외국 동전? 찌그러진 탄피?
  • 등장인물들과 인터뷰를 해 보라.
  • 일기를 쓰게 시켜보라.

“장소”는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다. 개성없는 장소, 거기가 거기같은 장소는 소설에 아예 나오지 않는 것이 좋다. 장소에는 내면의 장소(등장인물의 내면을 비추거나 담는 장소)와 외면의 장소(등장인물이 속한 세계, 더 나아가서 그 세계 사람들의 세계관을 비추는 장소)가 있다. 몰개성한 장소들에 식상한 현대 도시거주자들은 익조틱한 미지의 장소에 입맛을 다신다. 동물이나 식물도 등장인물이 될 수 있다. 주인공도 될 수 있다. 마법에 걸린 고양이나 말하는 토끼 말고 그냥 평범한 개나 소도 등장인물로 활약할 수 있다.

5. 독자를 사로잡기

독자를 유인하는 것은 첫 한 두 문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첫 페이지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미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주인공이거나 상황이다. 희한한 상황이나 주인공의 독특한 개성이 독자를 궁금하게 만든다.

미끼에 유인된 독자를 이야기 안으로 확실하게 끌어들여야 한다. 이것 역시 이를 수록 좋다.

독자는 약오르는 것도 좋아하고 깜짝 놀라는 것도 좋아한다. 깜짝 쇼를 써먹어라 – 즉, 신기한 이야기라는 힌트를 자꾸 주어라. 독자를 애달게 만들면서 입질을 놓치지 않고 서서히 유인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것이 바로 “바닐라”에 식상한 독자들이 원하는 것이다.

초보 작가에게 권할 만한 쉬운 출발은 “독특한 주인공이 희한한 상황에서 괴상한 짓을 한다”이다.

연습: 당신 자신의 삶이나 인간관계나 육신에서 한 가지 측면을 골라내어라. 모든 가식을 다 버린 상태에서 한 반 페이지 쯤, 그 한 측면을 만지작거려 보라. 거짓말과 상상은 같지 않다 - 상상력을 해방하라. 결과물을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당신의 주인공에게 인간의 냄새를 부여할 때 써먹어라.

6. 묘사

절대 피해야 할 것: 구체적이지 않은 묘사, 구태의연하고 닳아빠진 묘사. 모든 배경과 상황을 정밀사진이나 세묘화처럼 쓰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여 묘사할 것인지는 예술적 감각의 영역이다. 하지만 일단 묘사의 대상을 선택하였으면 최대한 구체적으로, 신선한 언어를 사용해서 묘사하라. 다시 한 번 명심: 독자가 원하는 것은 신선하고 흥미로운 경험이다.

신선하고 구체적인 묘사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감각적인 묘사이다. 감각 중에서도 시각적 묘사가 가장 강력하다. 가능하면 무엇이든지 해설하지 말고 묘사를 통해 “보여주라.”

연습: 사물들을 그냥 지나쳐 보지 말라. “만약에…”를 늘 생각하라. 작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연습. 상상력을 늘 개방해 두고 날카롭게 다듬는 연습. (작가들 성질이 예민한 이유가 다 있다.)

7. 대화

소설 속의 대화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경험 요소이다. 재미있는 소설들은 흥미로운 대화를 잔뜩 담고 있다. 대화를 잘 쓰는 것은 작가에게 대단히 유용한 재능이다.

실생활의 대화와 소설 속의 대화는 대단히 다르다:

  • 소설속의 대화는 훨씬 짧고 함축적이다.
  • 소설 속의 대화는 자주 갈등을 포함한다.
  • 소설 속의 대화는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 소설 속 대화의 목적은 (생활상의) 정보전달이 아니라 (스토리상의) 의미전달이다.

효과적인 대화 창조에 도움되는 팁들:

  • 긴 문장은 나누어라. 3문장 이상이면 너무 길다. 1/2 문장은 좋다.
  • 앞뒤가 안 맞거나 당장 뜻이 명확하지 않은 말들을 집어넣어라.
  • 갈등을 집어넣어라. 아니면 적어도 깜짝 쇼나 기발한 표현을 집어넣어라.
  • 화자가 컨트롤을 잃은 상태에서 말이 헛나오게 하라.
  • 화자를 흥분시키거나 벌벌 떨게 만들거나 초조하게 하라.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상대 화자로 하여금 그와 정 반대되는 감정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라.
  • 오해를 유발시켜라. 설명할 틈을 주지 말거나 말을 할 수록 오해가 더 깊어지게 하라.
  • 반복을 피하고 설명하지 말라.

이 쯤 하면 소설 속 대화가 어떤 건지 감이 왔을 거다. 그 감을 활용하라.

사투리, 틀린 문법이나 철자법, 비속어 등은 그 말투를 쓰는 인물의 개성 표현이나 스토리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쓰라. 혹 양념으로 쓰더라도 “양념”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이런 요소들이 무차별로 계속 튀어나오게 되면 독자는 식상한다.

이모티콘을 대량 삽입한 대화가 소설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다. 이모티콘을 쓴 성공적인 소설도 있다 – 주인공과 그녀가 창조한 AI가 주고받는 이메일로 구성된 소설이 있는데, (제목을 까먹었다) 상당량의 이모티콘을 쓰고 있다. 귀**씨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그놈은 ****”에 쓰인 이모티콘은 필연성이 부족하고 이 쪽은 스토리와 플롯 구성상, 또 등장인물의 개성상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대화를 처음부터 위에 예시된 대로 쓰려면 작위적이 되는 수가 많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쓰라. 퇴고할 때 갈고 닦으면 된다. 항목 9번, <퇴고>를 참조하라.

8. 시점

전통적으로 시점이란 누구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느냐로 정한다. 화자가 “나”인 경우 1인칭이고, 화자가 “너”를 주어로 써서 이야기를 하면 2인칭이다. 2인칭이 아니면서 화자가 작중에 등장하지 않으면 3인칭이다. 3인칭에는 전지적작가 시점이라 해서 화자가 마치 신과 같이 무소부재 무불통지하는 경우가 있고, 제한적 시점이라 해서 작중 등장인물의 관점 혹은 장면 내의 한 특정 지점에서 (이 경우 신이 아니므로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없어 “제한적”이라 불린다) 관찰하듯 이야기하는 형태가 있다.

1인칭 시점이 가장 친근하고 몰입하기가 쉽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은 이 점에서 가장 어렵다. 1인칭 시점은 장면 전환이 제한되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전지적 시점은 장면 전환이 자유자재하다. 3인청 제한적 시점이 두 가지의 중간 쯤 된다고 하겠고, 통속 소설에 흔히 쓰인다. 2인칭 시점은 왜, 어떻게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본 다음에 시도하라. 2인칭 시점이 거의 쓰이지 않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인칭 -> 3인칭 식으로 시점을 이동하는 것은 습작기의 작가가 능수능란하게 다루기는 쉽지 않은 테크닉이다. 하지만 같은 1인칭인데 소설 중간에 “화자”를 바꾸거나, 3인칭 시점에서 “관점”을 바꾸는 등의 기법은 흔히 쓰고, 또 비교적 쉽다. 습작기에 주의할 것이 있다면 이와 같은 시점 이동을 용의주도하게 고려하지 않고 하거나 무의식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3인칭 제한적시점을 쓴 습작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관찰자를 바꾼 경우가 많다. ) “시점 관리”라고나 할까, 시점에 대해서는 작가의 의식적이고 면밀한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원칙적으로 한 장면 내에서는 되도록 시점이 움직이지 않는게 좋다. 3인칭 제한적 시점에서는 동일 장면 내에서도 시점을 움직여야 할 때가 있는데, 이런 때 독자들로 하여금 시점 이동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거나, 적어도 시점이 움직인다는 것을 신경쓰지 않도록 하라.

시점을 움직이는 효과적이고 창조적인 방법 중 하나는 다른 장르 형태를 도입하는 것이다. 소설의 특성 중 하나는 텍스트 베이스의 어떤 장르든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 신문 기사, 편지, 일기, 등등.

9. 퇴고

“초고는 몽땅 불쏘시개다.” (헤밍웨이.)

일필휘지, 단번에 걸작을 써 내는 작가도 있긴 있다. 하지만 무수한 퇴고를 거듭한 끝에 태어나는 걸작이 더 많다. 습작기의 작가에게 권하는 일반적인 규범으로서 말하자면, 퇴고는 반드시 해야 한다.

퇴고는 초고를 완성한 후 좀 시차를 두고 하는 것이 좋다. 친구나 가족의 비평은 대체로 도움이 안 된다. 퇴고는 극히 조심스럽게 하라. 전체 소설이 어떻게 달라질지 염두에 두라.

초보 작가의 퇴고를 위한 체크리스트:

  • 우선 1: 덩치가 큰 수정을 할 경우, 고쳐야 하는지 어떤지 의심이 가면 고치지 말라.
  • 우선 2: 이 이야기가 혹시 다른 결말을 가질 수도 있을지 생각해 보라.
  • 정말 마음에 드는 장면들을 찾아라. 그 중 스토리의 진행에 불필요한 장면이 없는지 유심히, 아주 객관적으로 보라. 보통 한 두 장면 있다. 읍참마속 하라.
  • 주인공이 먼치킨이 되지 않았는가? (= 주인공의 동기가 절실하고 그럴 듯한가?) “나쁜 놈”이 혹시 너무 나쁘지는 않은가?
  •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걸 작가가 하고 있는가?
  • 불필요한 단어들 – 특히 형용사, 부사 – 를 지워라. 의미상 중복되는 단어들을 찾아 제거하라. 한 페이지 내에서 이유 없이 여러 번 중복되는 단어가 있으면 고쳐라.
  • 페이스를 늦추는 묘사나 설명을 빼거나 줄여라. 통속적인 표현을 없애라.

여기부터는 대화 부분을 퇴고할 때 염두에 둘 만한 항목들이다:

  • 대화가 3문장 이상이거나 완벽한 문장이면 고쳐라.
  • 대화가 개성을 드러내거나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면 고치거나 빼라.
  • 혼자서 연극 대사 읊듯이 대화를 플레이해 보라. 녹음해서 들어보라. .
  • 뻔한 문답은 필요없다. 뻔하지 않은 것을 집어넣어라.
  • 침묵을 써먹어라.
  • 반짝반짝 빛나는 대사를 가다가 하나씩 집어넣되, 너무 많이 넣지는 말라.
  • 대사에서 단어를 하나 둘씩 빼 보라.

10. 각종 조언들

1) 글을 쓰기 전에 – 등장인물

  • 주인공이 정말 원하는 게 뭔가? 그것은 독자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욕구인가?
  • 주인공이 그 욕구를 달성하는 데 방해하는 것이 있는가?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좋다.
  • 등장인물 리스트와 각각의 인물에 대한 묘사를 작성하라. 필요한 이상으로 자세히 하라. 특히 당신과 전혀 다른 성격의 등장인물에 정성을 기울이라.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적어 두라.
  • 어느 등장인물의 관점이 가장 많이 쓰이는가? (3인칭 시점에서)
  • 당신이 당신의 주인공에게서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 같이 여행하거나 데이트하고 싶은가? 왜?

2) 글을 쓰기 전에 – 독자를 사로잡기

  • 초장에 어떻게 독자의 주의를 끌 것인가? Any idea?
  • 각 장면에서 극적인 긴장의 요체는 무엇인가?
  • 초장은 이미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시작하는가?

3) 글을 쓰는 동안 주의점 – 긴장과 페이스.

  • 소설 초반부에서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몰입시켰는가?
  • 주요한 액션들은 모두 “독자의 눈앞에서” 일어나게 하라. 중요하지 않은 액션이라도 되도록 배경에서 발생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 좋다.
  • 스토리의 진행은 멈추지 않는 것이 좋다. 가급적이면 빠른 페이스가 좋은데, 통속 소설인 경우 빠른 페이스는 필수이다.
  • 주인공이 늘 무엇인가 행동을 하는가? 주인공이 등장했으면 뭔가를 해야 한다.
  • 서스펜스가 필요할 때 깜짝 쇼를 이용하라.
  • 시각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도입하라.
  • 되도록 인물들의 내면이나 감정상태를 직접 표현하지 말라.
  • 문제를 너무 쉽게 혹은 너무 빨리 해결하지 말라. 독자를 약올려라. 문제는 갈 수록 골치아파져야 한다. 주인공은 계속 고난에 처해야 한다.
  • 요약하거나 설명하지 말라. 묘사하느라 액션을 중단하거나 페이스를 늦추지 말라.
  • 매 장을 끝낼 때 독자를 안달나게 만들어라. 연속극이 어떻게 끝나는지 생각하라. 독자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말라. 그건 다음 장에 나온다… 고 암시하고 실망시켜라.

4) 글쓰는 동안 주의점 – 글이 막혔을 때.

  • 사전을 펴 보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를 찾아 보라.
  • 이상한 쪽으로 장면이나 스토리를 뒤집어 보라.
  •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을 꺼내 들고 중간쯤부터 읽어보라.
  • 자유연상으로 끄적여 보라.
  • 날씨가 좋다면 완행 표를 끊어 모르는 촌동네로 놀러가라. 빈 공책을 들고 가라.

5) Q and A

Q. 일찌감치 독자를 사로잡으라고 하지만, 설정과 주인공 묘사를 하지 않고 어떻게 스토리를 시작할까?

A. 상황에 처해서 이미 행동하고 있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Q. 깜짝 놀라게 하기“는 정말 어렵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A. 정상적인 반응, 독자가 기대함직한 결말, 등등을 생각하라. 딱 그 정반대를 쓰라.

Q. 주인공이 너무 평범하다.

A. 별난 외모상의 특징, 이상한 성격, 약점, 비밀 등을 부여하라. 재밌다고 너무 많이 하지 말라. 너무 써먹어서 닳아빠진 특성들도 피하라.

Q. 제언된 대로 퇴고를 하고나니 너무 간단하고 짧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A. 정상이다. 액자, 회상 등등의 고급 기법은 초보 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꼭 쓰려면 짧게 하라. 하여튼 첫 소설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짧은 게 좋다.

6) 집어넣으면 재미있어질 만한 아이템들

  • 소설의 엔딩에서 앞에 나온 의미심장한 사물, 대사, 단어, 이미지, 냄새… 등등을 떠올리면 좋다. 독자들은 이게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나 싶어서 열심히 궁리할 것이다. (심오한 뭔가가 있으면 정말 좋고)
  • 독백이 전혀 안 들어있다면 좀 넣어 보라.
  • 별 볼일 없는 등장인물이 너무 적어도 재미없으니 좀 집어넣어라.
  • “로고”가 있으면 좋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시각적 이미지 말이다. 심볼릭한 것이면 더 좋다.
  • 작중화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기억이 신통치 않거나 뭔가를 숨기고 있으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
  • 배경지식이나 자잘한 정보들이 재미를 배가할 수 있다. [백경]에 나온 선원들의 삶, 고래잡이 과정 등의 묘사에 이런 것이 잔뜩 들어있어 실재감을 높인다. 단, 설교하거나 강의하지 말 것.
  • 우연과 모순, 아이러니를 좀 넣으면 맛이 쌉살해 진다.
  • 대비를 좀 과장해 보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되는가? 그럼 좀 더 고생시킬 필요가 있다.
  • 같은 고생을 심화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새로운 골치거리가 등장하는 바람에 이미 하던 고생이 더 꼬이는 쪽이 더 재미있다.

7) 기타 유용한 팁들

  • 웃기고 싶으면 과장하라. 과장은 코메디의 정수이다. 아니면 축소하라. 축소는 과장의 정 반대 기법으로, 사실 반대 방향의 과장이다.
  • 일기를 쓰라. 작가 일기는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다. (나중에 성공하면 팔아먹을 수도 있다) 쓸 게 없으면 맘에 드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일기를 쓰게 만들라.
  • 당신이 습작을 하고 있다면, 이미 있는 소설을 해부해서 재조립하거나 지지고 볶고 뒤집고 주물러 보라. 범작이지만, 테리 브룩스가 톨킨을 이런 식으로 갖고 놀다가 샨나라 씨리즈를 쓰는 바람에 떼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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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02 11:13 2003/05/0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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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나라 팬덤에도 이 [네크로노미콘]이란 책에 대한 관심 역시 일고 있다. 게임을 즐기는 분들 역시 크툴루 신화를 배경으로 쓴 여러 게임들이 인기를 끄는 바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우선 한 가지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 네크로노미콘은 크툴루 신화와 마찬가지로 러브크래프트의 창조물이지 현실의 책이 아니다. 크툴루 신화의 곁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러브크래프트는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 이 신화적인 책을 진짜 있는 책인 양 자기 소설 여기저기에 등장시키는가 하면, 동료 작가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언급하기도 하고, 이 책에 대한 논문까지 썼다. 오따쿠 독자들의 상상력과 열의가 합세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책이 정말 있는 듯 정밀한 거짓말이 태어난 것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네크로노미콘은 당연히 모두 가짜고, 어디까지나 재미있는 환상의 창조물로서 대해야 한다.

하여튼, 러브크래프트에 따르면:

8세기 경의 마법서로 저자는 [미친 아랍인]이라는 별명으로 후세에 알려진 압둘 알하즈레드(Abdul Alhazred)이다. 원래 제목은 [Al Azif]고... 13세기경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다시 마법사 존 디에 의해 영역되었다고 한다. 중세와 근세를 통해 유럽에서는 금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언더그라운드로 돌아다녔다고 하고, 원본은 물론 남아있지 않고, 정역본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연하지... 원래 없는 책인데) 뭐 대영박물관 비밀창고에 한 권 있다고도 하고...

돌아다니는 가짜 중에는 아예 아랍어 원문까지 공들여 “제조“한, 정말 진짜같은 가짜도 있다. [Al Azif: The Necronomicon], by Abdul Al-Hazred 이라고, Owlswick Press에서 1973년에 나온 책인데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굉장히 비싸고, 스프라그 드 캠프가 서문을 썼다 (마치 진짜 정역본인 것 처럼...) 애시톤 스미스나 스프라그 드 캠프나 [사이코]의 작가인 로버트 블록 등등 네크로노미콘과 연관된 작가들은 죄다 러브크래프트와 친분이 있었고, 이 기차게 재미있는 [네크로노미콘] 전설 제조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

[신의 지문] 등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콜린 윌슨(이사람 얘기 순진하게 그대로 믿으면 안됨)도 네크로노미콘에 대해 썼다. 그는 뵈니히 문서[The Voynich Manuscript] 라고 진짜 있는 신기한 암호 문서 (가상의 동식물 그림과 해독 불가능한 문자가 가득) 를 해독해 보니 네크로노미콘이 나오더라, 라고 주장한다. 물론 거짓말.. 이 괴문서는 진짜 존재하는 문서지만, 아직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다.

아래의 링크에 가면 네크로노미콘의 역사와 내용에 대해 잘 소개하고 있다:

http://www.geocities.com/SoHo/9879/necpage.htm

러브크래프트의 에세이 [the History of Necronomicon]은 두 종류의 버전이 존재한다. 여기 가면 원문을 읽을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 관련 싸이트는 무수히 많지만, 이곳을 추천.

2003/04/14 12:51 2003/04/14 12:51

2003-02-16

Berserk, 또는 Berserker: 원래 스칸디나비안 어에서 독일 - 영어권으로 넘어온 말이며, 라틴어나 그리이스어와는 관련이 없다. 영어로는 버저어크(제 2음절에 액센트) 라고 발음한다. 현대영어에서는 go berserk 하면 화가 난다든지 해서 “하이바가 열렸다“ “눈이 뒤집혔다“ “눈에 뵈는게 없어졌다“ 이런 뜻으로 쓰고 있다. 노르웨이어로는 Berserkr이다.

Ber 는 스칸디나비아 어의 Bjorn( o 의 모양이 좀 색다른데, 그리이스어의 “피“ 와 닮았다. 독일어 식으로 표현하면 o 위에 점 두개, 그러니까 발음이 “비외른“) 의 약어형으로 Bear 즉 곰이다. 영어식으로 해석해서 벌거벗었다는 (bare) 뜻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원상 스칸디나비아 말의 “곰“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Serkr 는 Shirt, 즉 웃옷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bearskin 혹은 bearshirt 라는 뜻이 되어서 Berserk는 곰가죽 옷을 의미한다. 베르세르크들이 전투시 곰이나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싸웠다는 속설에 부합하는 것이다. 베르세르크 전설과 워울프 전설은 그 기원상 서로 상관이 있는 것 같고, 신화적 구조로 볼 때는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여겨진다.

베르세르크는 역사적으로 실존했었다.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한 무리의 베르세르크들이 노르웨이 왕 헤랄드 1세 (872-930) 의 친위대로 고용된 적이 있었다.

현대 전투에 베르세르크 식으로 양성된 전사들을 투입한 예가 있는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병사들 중 약물중독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한 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비슷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는 혐의가 있다. 그런 혐의가 불거질 때마다 비판이 거세지만 입증되거나 처벌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오늘날의 의학 기술로 병사들을 진짜 베르세르크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하지만 사실상 별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고, 그래서 실험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나 국제 사회의 비난 때문이 아니고, (언제 그런 게 군사기술 개발에 심각한 장애가 된 적이 있었던가?) 딴 이유 때문이다. 두 가지 대표적인 이유를 들어 보면:

1) 베르세르크가 두려운 것은 그들이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들이라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비인간적이라는 데 있다.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싸울 때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인간들의 예측에서 벗어난 행동을 예사로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병사들이 실제로 적을 공황 상태에 빠뜨리려면 상대방이 그 비인간적인 모습을 두려워해야하는데... 현대전에서 대체 인간적인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현대전의 병사들은 도무지 상대방의 피나 단말마를 지켜볼 기회도 별로 없고, 전투는 실제적으로 “비인간“ 들이 거진 다 하고 있다.

게다가, 월남에서 약 먹고 돌아버린 미국 부대보다 맨정신으로 멀쩡하게 싸운 한국의 자랑스러운(?) 맹호부대가 훨씬 더 무서웠다고 한다. 맹호부대원들이 베트콩의 머리를 베어 축구를 했다는 전설(?)은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지만, 한국 부대의 용맹...이 아니고 잔인성이 얼마나 인상깊었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미국 병사들은 누가 베트콩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구별해 내려고 노력을 했는데 -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 2차로 참전한 한국 군인들은 기본적으로 무조건 쏴 죽였다. 베트콩이라서, 공산주의자라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놈들이라서 죽인 게 아니었고, 죽일 수 있고 따라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모르는 사람“은 죽여놓고 보는 게 확실히 안전하니까 일단 - 애부터 노인까지 - 죽이고 본 것이다.

맨정신의 인간이,이성을 잃지 않고 자기보존 본능이 멀쩡히 작동하는 인간이, 베르세르크니 워울프보다 훨씬 무섭고, 잔인하고, 따라서 훨씬 더 잘 죽인다는 거다.

2) 전설의 베르세르크들이 베트남 전에서 약 먹고 돌아버린 미국 애들보다 더 무서웠다면, 단 한 가지 때문이다 - 종교적, 윤리적 정당성과 우월감.

베르세르크들은 자기들이 오딘 신의 친위대라고 생각했고, 약물 - 알코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에 의한 최면상태 또는 그 이상의 최면을 자진해서 받아들였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황홀상태였고, 말하자면 탈혼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불사신이었다기보다 종교적인 견지에서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어딘가에 속하고 있었고, 따라서 인간들의 조잡하고 무력한 공격이나 무기는 물론이고 인간들의 윤리, 인간들의 나약한 제도나 법률 따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미국 병사들이 전쟁후유증으로 미국 사회 전체가 들먹거릴 만큼 애를 먹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들 베르세르크들은 신 앞에,그리고 자기들이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강간하고 - 이것이 그들의 전문이었다 - 한 인간들 앞에 당당하고 떳떳했으며, 오히려 신의 축복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베르세르크들은 맨정신일 때도 살인 강간을 예사로 했으며, 더구나 적군과 아군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베르세르크들을 고용한 나라나 마을에서는, 그 전설적인 전사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 마을사람 몇이 살해당하고 마을 계집애들 몇이 강간당하는 것을 감수했던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기술만 가지고는 베르세르크를 만들 수가 없다. 종교적 열광이 윤리와 무관하게 떳떳이 통용되는 문화 안에서만 그런 것이 가능하다.

근래의 판타지 소설 일부는 베르세르크를 상당히 낭만적으로 묘사하는데... 확실히 낭만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히틀러도 그런 면에서 볼 때 로맨티스트였다. 나는 베르세르크 같은 전사들이 판타지에만 나오고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섭섭하지 않고,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2003/02/16 14:30 2003/02/16 14:30

역사책 읽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더우기 프로테스탄트 학자가 쓴 교황사라니, 뭔가 톡 쏘는 맛이 있지 않을까.

역사는 서양 학문 족보에서 철학보다는 수사학에 가까운지라 내 전공과 밀접하다. 전공서적은 일단 재미가 없지만 역사는 재미있다. 타키투스는 정말 재미있었다. 이 책도 기대를 잔뜩 하고 읽었는데, 과연 재미있을 뿐 아니라 예견했던 대로 톡 쏘는 맛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교황이라 하면 한국 사람들에겐 그저 천주교의 우두머리인가보다 하는 정도의 이해에 그치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그게 아니다. 오늘날의 유럽은 교황권이 없었으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발전했을 터이다. 유럽이라는 문화적 신원의식 자체도 교황권에 빚진 바 크다. 이 책은 그 빚진 내용들 중에서도 특히 어떻게 이 종교적 위계제도가 그토록 오랜 기간 살아남아 아직도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지, 그 적응과 생명력의 비밀에 천착한다.

작가는 요한 12세 (재위 955-964) 같은 인간말종에게 (18세에 교황이 되어 27세에 복상사함) 조소를 보내는 동시에 그레고리우스 7세, 이노첸시우스 3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칭송한다. 역사학자인 그의 시각에는 역사의 추이를 넓게 멀리 읽고 많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그런 통찰을 활용한 인물들이 위대하게 비추어진다. 예컨대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경건왕 루이는 종교적으로는 성인일런지 몰라도 황제로서는 낙제인 것이다. 양 쪽 방면에서 다 훌륭할 수는 없었을까.

제도 종교는 과거에 집착하고 Status Quo를 수호하려는 방향으로 그 힘을 기울일 수도 있겠고, 그 반대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촉진하는 혁명적인 세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 쪽 다 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위험한 종교는 역사의식을 결여한 종교가 아닐까. 천국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을런지 몰라도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우리는 뒤를 돌아다보고 앞을 겨누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초월과 내재를 함께 포용할 줄 아는 종교, 혹은 그런 종교인들이 필요하다.

출판정보: Geoffrey Barraclough, [The Medieval Papacy.] Norton, W. W. & Company, Inc., 1979. ISBN: 9780393951004

2003/02/12 14:27 2003/02/1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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