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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이 작을 때 쓰는 시스템 (152) 2007/12/23

여러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현재 하숙방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전용 리스닝 룸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제일 넓은 공간인 거실도 4평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스피커는 평판이고 평판을 잘 울리는 앰프는 직렬 3극의 싱글이지만, 평판은 방이 작으면 쓸 수 없는 스피커 형태이므로 이런 콧구멍만한 공간에서는 안 된다. 평판 다음으로 좋아하는 대형 혼도 역시 무리다. 대형 스피커들은 사실 방을 스피커 시스템의 일부로 생각해야 하는데 리스닝 공간이 받쳐주지 않으면 대형 스피커 특유의 세계를 즐기기 보다 고문을 당하고 있는 형국이 되기가 십상이다. 이런 연고로, 지금 쓰고 있는 시스템은 그야말로 나의 이상형과는 정 반대의 모양을 하고 있다 -- 소형 2웨이 모니터와 TR 앰프로 구성된, 극히 보통의 오디오 시스템. 다소 처량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들으러 다닌 끝에 선정한 시스템이다. 직렬 삼극과 대형 스피커의 통쾌한 음을 이런 미니 시스템으로 흉내내기는 어렵겠지만, 비스무리한 냄새가 조금은 나야 할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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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서브시스템으로 쓰던 브라이스튼과 ATC의 조합을 다시 채용해도 좋을 것이었지만 굳이 그 시스템을 내다 팔고 다시 짜맞춘 것은, 역시 ATC의 저역 한계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ATC의 아랫도리는 중후하고 심지가 있는 좋은 소리이지만 레인지가 너무 좁다 -- 70Hz 정도가 고작이어서, 오페라나 낭만파 이후의 교향곡 등을 듣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ATC를 좋아한 이유는 그 다이내믹 레인지와 마치 대형 스피커를 듣는 것 같은 유유자적한 음 조성 때문이었는데, 소형 2웨이 중에서 그 쪽으로 ATC를 뛰어넘는 스피커가 있을까? 그런 스피커는 수가 아주 적은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부자들은 큰 집에 산다. 소형 스피커를 살 이유가 별로 없다. 서민들은 작은 집 때문에 작은 스피커를 쓰게 되는데, 돈이 많이 없으니 비싼 스피커를 살 수가 없다. 소형 2웨이로 100dB를 넘는 음량을 뻥뻥 내려면 당연히 호되게 비싸진다. 물건을 만들어 팔아서 돈을 버는 회사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시장 규모가 있어야 제품 기획을 할 것이므로, 이렇게 수요가 별로 없을 것 같은 "비싼 소형 스피커"는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그 나오기 어려운 "괴물 소형 스피커"들이 그래도 몇 개 있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선택한 스피커는 베리티 오디오의 파르지팔 모니터. 보통 오디오 살롱에 가면 파르지팔 풀 시스템을 전시해 놓고 있기 때문에 파르지팔에 모니터 버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 것으로 생각한다 -- 하지만 원래 파르지팔은 모니터로 기획된 스피커이다. 베이스 부는 나중에 추가 설계해서 단 거고... 베리티 오디오의 고객들 가운데는 프로 녹음 기사들이 많고, 바로 그 때문에 파르지팔은 전용 운송케이스에 넣어 배달된다. 녹음현장에 상용 모니터를 들고 가야 하는 녹음 기사들 때문에, 아직도 파르지팔 만큼은 모니터 버전을 팔고 있다. 파르지팔 풀 시스템은 2000만원을 가볍게 넘는 대단한 가격. 모니터 버전도 만만찮게 비싸서 800만원을 넘어간다. 파르지팔 풀시스템은 워낙 비싼 과르네리 메멘토보다도 더 비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대단히 훌륭해서 돈 값을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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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과르네리 얘기가 나왔으니 소너스 파베르와 비교를 좀 해 보자면: 파르지팔 모니터는 과르네리 메멘토와 같은 족보의 유닛을 쓰고 있지만 (오디오 테크놀로지의 4H와 스캔스픽의 9700 레벨레이터를 달고 있다. 과르네리는 15H와 7000의 조합이다) 크로스오버가 완전히 다르고 따라서 소리도 확 다르다. 과르네리는 2차의 아주 완만한 필터를 쓰는데 반해 파르지팔은 4차를 쓴다. 크로스오버 포인트도 달라서 파르지팔은 5KHz의 아주 높은 주파수에서 트위터가 들어간다. 음악의 기음을 대부분 4H가 재생하게 되므로, 풀레인지에 수퍼트위터를 달았다고도 할 수 있는 특이한 구성이다. 과르네리가 고음을 담당하는 7000 링 래디에이터의 화려하고 상큼한 음색을 전면에 내세우는 반면 파르지팔은 4H의 날카롭고 예민한 중저역이 음의 표정을 지배한다. 과르네리는 인클로저가 여유있는 용적이고 다소 울리는 편이라 소리도 빠짐이 좋고 활달하다. 반면에 파르지팔 모니터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단정한 소리를 낸다. 양자의 공통점이라면, 음량을 올리면 올릴 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음장, 더욱 솟구치는 음의 기세. 이런 것들은 바로 대형 스피커의 특장점인데 소형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는) 달성한 것이다. 그래서 비싼 거고... 개인적으로 침착하면서도 잘 벼린 칼날같은 파르지팔의 개성을 과르네리 메멘토의 나긋하고 섹시한 개성보다 더 좋아한다. 뭐 ATC의 음을 좋아한 사람이 동시에 소너스 파베르를 좋아하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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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지팔을 울리는 일렉트로닉스는 설명이 필요없는 쿼드의 99-909 시스템이다. 쿼드는 옛날 학창시절부터 좋아했었고, 405는 두 번이나 산 적이 있다. 405의 현대판이 909이므로 (회로도 거의 똑같음) 그 소리는 잘 알고 있다. 쿼드의 CDP는 66시절부터 소리 좋기로 정평이 있었고 99CD도 그 음을 똑바로 계승하고 있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최고 레벨의 중음역, 넉살좋고 약간 끈적한 저음, 살짝 까슬하고 처지면서도 감촉이 좋은 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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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자면, 쿼드의 개성과 파르지팔의 개성은 서로 잘 맞지 않는다. 파르지팔은 얼른 듣기에 아주 순하고 고운 음을 내는 것 같지만 그 속에 강철같은 깡다구를 숨기고 있는 스피커다. 선진적이고 타협을 싫어하는 파르지팔이 중용과 절제를 가훈으로 삼는 쿼드를 만나서 소리가 좀 어색하다. 파르지팔을 맥코믹의 세퍼릿으로 울렸을 때의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었고 크렐의 신형 파워도 그런 대로 좋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놈들은 모두 몬스터급의 대형 앰프들이다. 작은 방에 작은 스피커로 짜는 시스템에 크렐의 레퍼런스를 들여다 놓기는 싫다. 쿼드는 딱 안성맞춤의 크기로, 베리티와 마찬가지로 디자인 센스가 좋아 내 방에 놓으니 그림이 그럴싸하다. 오디오를 오로지 소리로만 선택하는 분들도 많고 그런 선택의 기준이 아마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테이지의 모양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 그림이 좋다면 앰프와 스피커의 개성이 충돌하는 어색함을 다소는 참을 수 있다. 물론 어색하다고 해도 그것은 아아아주 미세한 것으로, "최고의 매칭은 아니다" 정도의 레벨에서 하는 얘기다.

디자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쿼드를 담고 있는 저 수납장은 오디오용이 아닌 평범한 사이드테이블이다. 아이키아에 갔더니 세일을 하고 있길래 사 버렸다. 전용이라고 생각될 만큼 쿼드와 싸이즈가 딱 맞다. 이래저래 안성맞춤인 소형 시스템, 합계 1000만원을 넘어가는 가격이니 크기와 무게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긴 하지만 마음에 흡족하다. 저역도 50Hz 까지는 문제없이 죽 내려가고, 벽에 1미터 내외로 갖다 붙이면 40Hz까지도 내려간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플래토 제의 날라리 스피커 스탠드. 디자인으로나 가격으로나 도무지 격에 맞지를 않는다. 빨리 내보내고 제대로 된 놈을 받쳐주고 싶다...

2007/12/23 22:08 2007/12/23 2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