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수인 오디오 매니어 중에서도 아주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이다.

무슨 취미든 매니어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일단 그 자체로 소수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매니어들은 나름대로 고집스런 취향이 있는데, 거의 종교적인 수준의 고집을 가진 분들도 적지 않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내 취향이라는 것이 좀 유별나서 그리 많은 동료를 가지지는 못한 듯 하다.

취향 1번은 출력에 대한 것이다. 나는 출력이 큰 제품을 좋아하지 않고 그 대신 능률이 좋은 시스템을 선호한다. 능률은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음악소리로 바꾸느냐 하는 것인데, 스피커의 경우 SPL이라 하고, dB/W/m로 표시한다. 능률이 좋으면 출력은 아주 작아도 된다. 가격은 싸지고, 환경오염도 덜 하다.

취향 2번은 주파수 대역 폭에 대한 것이다. 나는 아주 낮은 저음, 아주 높은 고음이 음악의 전면에 앞서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중음, 사람 목소리 부분이다. 쿵쿵 울리는 저음, 스피커가 부르르 떠는 것은 선전에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금방 싫증나는 소리이다. 상쾌하고 차랑차랑한 고음도 얼른 듣기에 기분좋지만, 역시 여러가지 음악을 오래 즐기는 데는 방해가 될 때가 많다. 아름다운 중음은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것이고 또 음악을 즐기는 데 필요불가결하다. 저음과 고음은 중역을 해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도와주는 한도 내에서 필요한 만큼 나와 주면 족하다.

취향 3번. 원음 재생을 지향하지 않는다. 나는 디스크에 들어있는 음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원래 녹음할 때 났던 그 소리와 똑 같이 리플레이 하려는 생각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환상, 그럴 듯 하고 기분좋은 거짓말이다. 어차피 오디오는 진짜가 아니다... 금강산을 찍은 사진은 아무리 잘 찍어도 금강산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나름의 사진예술일 수는 있지 않는가? 금강산을 직접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경험의 세계를 가진 예술. 나는 오디오에서 진짜에 육박하는 사실감을 구하지 않고 진짜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자적인 예술성을 찾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오디오매니어 주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취향 4번이 결정적으로 나를 주류에서 갈라놓는 별난 부분이다...

취향 4번. 나는 내 방이 원래 녹음이 이루어졌던 장소로 탈바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을 [Sound Stage] 라고 하는데, 현대적인 스테레오 장치나 멀티채널은 녹음이 이루어졌던 장소의 공간감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방의 벽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녹음현장이 출현하는 마술을 부린다. 내가 내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라스칼라 대극장의 객석에 앉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마술도 참 신기하고 재미있지만... 나는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가들이 내 방에 찾아오는 것이다 -- 내가 그들이 연주를 벌이는 무대로 찾아가는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내 방에 들어오면 상당히 비좁다. 그래도 괜찮다. 록 밴드가 내 방에서 연주를 하면 제법 시끄럽다. 그것도 괜찮다. 집주인인 내가 조절하면 된다. 조절해서, 좁은 방 안에서 오케스트라의 스케일과 록 밴드의 거칠은 박력을 "느낄" 수 있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음악가들이 내 방에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그들의 체취랄까 존재감을 내 방 안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I am there" 가 아니고 "they are here, in my room" 을 원한다는 얘기다.

오디오 매니어가 아닌 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솔직히 황당하고 뜻없는 X소리에 불과할 지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대체로 어떤 취미든 매니어 -- 돌았다는 뜻이 아닌가 -- 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하면 그런 법이다. 나는 SF와 판타지도 좋아하지만, 그 쪽으로 [매니어]인 분들이 만약 장르소설 잘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SF나 판타지 이야기를 신명이 나서 늘어놓으면, 약하게는 좀 이상한 친구로군, 심하게는 별 미친 X 다 보겠네, 이런 대접을 받을 게 틀림없다....

2003/02/10 12:01 2003/02/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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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하면 부자들의 도락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실지로 그런 면도 없진 않지만, 다음 글을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나의 오디오 첫 걸음은 아마 국민학교 5학년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70년대 말이 되겠다. 그때 한국의 오디오... 라기보다 음악을 즐기시던 분들의 사정이 어땠냐 하면...

소프트 쪽으로는 백판 (해적판 LP)과 역시 해적판 카세트 테입이 시장을 형성하고 한심한 수준이었지만 라이센스 LP가 조금씩 나오던 시절이었다. 하드웨어는 여전히 일제 장전축 (커다란 TV같이 생긴 가구풍의 물건인데 라디오 + 레코드플레이어)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월남에서 들어온 소형 카세트 녹음기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물론 부잣집에 가면 미제 장전축이 있었고 갑부들은 독일제를 가지고 있었다. (집 창고에 혹시 독일제 장전축이 있다면 절대 버리지 말기를! 그거 뜯어서 부품으로만 팔아도...)

서민들에게는 금성에서 만든 테이블탑 형 라디오가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는 분들이 역시 금성에서 만든 별표전축을 살 수 있었다. 이 별표전축이 가격 (미제나 일제의 반값도 안 되는 싼 가격)에 비해 성능이 좋아, 많은 사랑을 받았더랬다.

어린 학생들은 물론 이런 사치를 꿈도 꿀 수 없었고, 솔직히 "음악을 듣는게 취미다" 이런 아이디어 자체가 그 시절엔 희귀한 것이었다.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국산품 카세트 라디오도 하나둘씩 보급되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라디오. 삼성에서도 하나 만들었는데 쉐이코의 인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당시 가격으로 무려 30,000원을 호가했으니까 가난한 학생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엔 "음악을 들으러 친구집에 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TV 보러도 많이 갔었지만...)

우리 집에는 다행히도 장전축이 하나 있었다 - 선친이 음악을 좋아하셨던 까닭에. 하지만 이걸로는 당시 미디어 컨텐츠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카세트 테입을 들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그런 걸 사달라고 조르는 짓은 자살행위였고, 궁리끝에 가장 돈이 안 드는 방법을 찾아 냈는데 그게 내 AUDIO 인생의 출발이었다.

그 방법이란 이거다: 방천시장이라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헐값에 파는 무허가 상점들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부서진 (그러나 동작은 하는) 카세트 메카니즘을 구입한다. 2000원 정도 준 것 같다. (2000원이면 카세트테입이 무려 3개. 공립 국민학교 육성회비가 6000원 하던 시절이다. 거금이다...) 이 물건 - 카 스테레오 부서진 것이었는데 - 에서 음성출력을 따 내서는 장전축에 연결한다. 그 당시 장전축에는 외부입력을 받아들이는 단자 같은게 없었기 때문에 LP 플레이어에서 오는 신호선을 뜯어내고 거기다가 연결하는 것이다.

수 차례의 눈물어린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소리가 나왔다. 그 때의 희열이란... 그래서 처음으로 들었던 음악이 닐 영의 [Heart of Gold] 였다.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 지 30초만에 할머니께서: "에에~ 시끄럽다!"

대중음악은 전혀 듣지 않으시던 아버지도: "이게 무신 쌍넘 재주넘는 음악이 나오노?"

참고로 쌍넘 재주넘는 음악이란 아버지 나름으로 Rock'n'Roll을 표현하신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쏘니에서 워크맨 (아.. 기억하는가 이 이름)을 발매한다 -- 모델명 FM1. 라디오도 안 나오고 녹음도 안되고 오직 플레이만 되는 카세트가 당시 가격으로 무려 150불, 한국에서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초창기에는 20만원이라는 대졸 초봉을 웃도는 가격에 팔렸더랬다. 우리 반에 갑부 아들내미 하나가 이걸 학교에 들고 와서는 어떻게나 자랑을 하는지... 확 밟아 부셔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 어떻게든 아양을 떨어서 그걸 한 번 들어봐야 하니까. 그 환상적인 음질 -- 아직도 미니카세트 좋아하는 분들은 이 FM1을 높게 평가한다.

내가 중학교 들어간 다음 삼성에서 마이마이를 출시한다. 10만원이 조금 안되는 가격에 팔렸다. 여전히 꿈의 가격이다. 나는 꿋꿋이 그 두들겨 붙인 장전축+카세트로 동네 레코드가게에서 녹음해 온 테입을 들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마이마이를 사기 위해서 신문팔이를 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꿈에 그리던 "나의" 카세트라디오를 갖게 된 것은 중3때였다. 눈물을 다 흘렸던 기억이 난다. 에로이카나 인켈이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지만 그런 것들은 별세계 이야기였고, 테입을 말아먹지 않고 FM이 제대로 잡히는 삼성 카세트 라디오는 그 후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나의 보물 1호였다. 저음을 더 많이 내고싶어서 스피커 앞에 골판지로 나팔을 만들어 대었던 기억도 난다. (나의 첫 혼 스피커!)

"에이 그게 무슨 오디오야?" 그럼 뭐란 말인가? 나는 지금도 마음을 울리지 못하고 돈만 비싼 수퍼 하이엔드 보다는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에 어거지로 때워붙인 옛날의 그 별표전축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거기서 비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감동하고 즐거워 했으니까...

수도권에서 자란 분들은 내 얘기에 시대적인 혼란을 느낄 지도 모르겠는데... 지금도 좀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과 지방의 문화수준 차이는 엄청났었다. 서울살던 오촌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걔네 집은 아주 부자였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의 고등학생이었는데 자기 방에 그 당시만 해도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던 Marantz니 JBL 같은 외제 컴포넌트들을 셋업해 놓고 있었다. 거 정말 눈돌아가더구만.

2003/02/09 11:38 2003/02/0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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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is McMaster Bujold. 1949년 미국 생 여류 SF/판타지 작가. Miles Vorkosigan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스페이스 오페라 씨리즈로 유명하다. 여러 번의 네뷸러, 휴고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아줌마이다. (2008 첨가: 행복한 책읽기에서 마일즈 보르코시건 씨리즈를 번역 출간 중임.) 아래 내용은 부졸드 오피셜 팬페이지에 실린 자기소개이다.


나는 1949년에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났읍니다.... 1972년에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졸업했구요. 애가 둘 있읍니다 - 앤 하고 폴이요. 저는 오하이오 마리온에 쭉 살다가 근래에 미네소타로 이사했읍니다.

저는 평생 독서광이었읍니다. 국민학교땐 서부 활극에 미쳤었고, SF는 9살때부터 읽기 시작했읍니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요. 아버지는 오하이오 주립대의 공학 교수였는데 SF 팬이셨더랬읍니다... 그 후 SF 말고도 역사, 미스터리, 로맨스, 전쟁물, 시 등을 즐겨 읽었읍니다.

중학교때 뭔가 써 보겠다고 첨 시도했지요. 중 2땐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흉내를 내서 조각글을 쓰기 시작했읍니다. 고등학교땐 친구들이랑 릴레이 소설도 쓰구요...

대학 가서는 첨에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금방 때려쳤읍니다. 제 진짜 관심은 비평 쪽이 아니고 글을 쓰는 거였거든요. 하지만 대학 때 취미붙인 야생동물과 근접사진 찍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가기도 했는데, 그 때의 경험이 첫 소설 쓸 때 배경 설정하고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읍니다. 글쓰기의 근사한 점은 아무 경험도 헛되지 않다는 겁니다. 실패한 경험조차도.

대학 나온 담엔 결혼하기 전까지 주립대 대학병원에서 제약담당 기사로 일했읍니다. 글 쓰는 거 하곤 거리가 멀었던 시기였지요.... 하지만 글 읽는 데는 정말 성과가 많았던 때였읍니다. 학교 스탭으로 일하니까, 2백만 권이나 되는 학교 소장 책들을 멋대로 뒤적일 수 있었거든요.

그 즈음에 저의 옛 친구 - 고교시절 릴레이 소설 같이 쓰던 - 릴리안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읍니다 - 그러니까 출판사에 처녀작을 판 겁니다. 그래서 생각했지요... 쟤가 할 수 있다면 난들 왜 못하리. 그 때 난 직장을 그만 두고 실직 상태에 애까지 둘 딸린 형편이었지만, 글 쓰는 데 무슨 자본이 들지는 않지요. 습작으로 단편을 하나 쓴 담에 친구 릴리안과 미네소타 사는 판타지 작가 패트리샤의 도움을 받아 첫 소설을 쓰기 시작했읍니다.

그러고 금방 깨달은 건, 창작은 취미로 하기엔 너무 힘들고 소모가 많다는 거였지요. 프로 작가가 되지 않으면 만족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됐든 - 실제로 글을 쓰는것이든 퇴고나 편집이든, 전문 글쟁이가 되는 법을 꼭 배우고야 말겠다고 결심했읍니다. 요 시기가 제가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 정말 성과가 많았던 때였읍니다... 남들에겐 잘 안 보였을 겁니다만.

그래서 쓴 첫 소설이 바로 Shards of Honor (명예의 편린. 1983) 이고, 두번째가 The Warrior's Apprentice (전사의 도제. 1984)였읍니다. 세 번째가 Ethan of Athos였구요.(1985) 출판사에 원고 보내고 검토하는 동안 기다리는 그 과정은 그야말로 고통스럽게 느린 것이었읍니다. 단편도 몇 갠가 써서 잡지 같은 데 보냈지요. 1984년이 저물 때 쯤 비로소 Ethan of Athos가 Twilight Zone 잡지에 팔렸읍니다 - 처음으로 원고를 팔은 거죠. 1985년 말 경에야 비로소 첫 세 소설이 다 Baen Books 출판사에 팔려서 1985-1986년에 걸쳐 제대로 된 책으로 나오게 됐읍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은 제가 석달마다 그 책들 한권씩 쓰신 줄 아는데 아닙니다.

87 - 88년에 아날로그 매거진에서 제 네번째 소설 Falling Free (자유낙하)를 연재하게 됩니다. 그게 저의 첫 번째 네뷸러 수상작이지요. 정말 기뻤던 건, 아빠가 제일 즐겨 읽으시던 잡지 애널로그에 제 글이 실렸다는 거였읍니다. 그 후 The Mountains of Mourning 도 애널로그에 실려서 그 해의 중편부문 휴고와 네뷸러를 같이 먹었지요. The Vor Game 하고 Barrayar 는 1991년하고 1992년 휴고 소설부문에 뽑혔구요. 그 이래 제 소설은 17개국어로 번역되었읍니다.

첨으로 하드커버 본을 낸 건 1992년의 역사 판타지 The Spirit Ring 입니다. 제 주인공인 마일즈가 등장하는 소설로는 1995년 휴고와 로커스 상을 받은 Mirror Dance 가 하드커버로 나왔구요. Cetaganda는 첨에 애널로그에 연재되다가 96년에 Baen Books 에서 하드커버본으로 나왔읍니다. 첨으로 편집을 해 본 건 95년 Roland Green씨하고 모음집 Women at War 를 Tor Books에서 낸 거였읍니다. Memory도 1996년 10월에 하드커버로 나왔고, 휴고와 네뷸러에 노미네이트됐었읍니다. 그 후속 Komarr는 1998년 6월에 출판됐는데 Minnesota Book Award in the science fiction and fantasy 를 받았읍니다. 그 씨퀄인 A Civil Campaign 이 11월에 나와서 저의 6번째 휴고 노미네이트, 4번째 네뷸러 노미네이트 작품이 되었지요...

새 판타지로는 The Curse of Chalion 이 있는데, Avon/Eos 출판사에서 2001년 8월에 나왔읍니다. 이 책으로 7번째 휴고 노미네이트 되었고요, 처음으로 월드 판타지 어워드에도 노미네이트 되었읍니다. 2003년 네뷸러 일차투표 대상이기도 하구요...

마일즈가 나오는 새 소설인 Diplomatic Immunity (외교면책권) 가 Baen Books 에서 2002년 5월에 하드커버로 나왔고, 2003년에는 페이퍼백으로도 나올 겁니다.


부졸드의 팬페이지 주소: http://www.dendarii.com

2003/01/29 13:34 2003/01/29 13:34